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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사도적 권고 1979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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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0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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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사도적 권고 1979년 3월 4일

구속은 새로운 창조

세상의 구원자!

그분에게서 창세기가 천지 창조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몇 번이나 거듭하여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던 창조의 근본 진리가 새롭고 훨씬 놀라웁게 계시되었다. 선(善)은 지혜와 사랑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드신 세계, 죄가 들어오자 “제 구실을 못하게 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본래 지녔던 지혜와 사랑이신 신적 원천과 맺는 유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였다.

참으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 이 유대가 인간 아담 때문에 끊어졌듯이, 이 유대가 다시 이어진 것도 인간 그리스도 안에서였다.

20세기에 사는 우리야말로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과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 사도의 웅변적인 말씀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별히 금세기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영역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거창한 진보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적나라 하게,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보이고 있지 않은가?

급속한 공업화 분야에서 빚어지는 자연 환경 오염의 위협이라든가, 끊임없이 거듭거듭 발생하는 무력 충돌이라든가,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과 이와 유사한 무기들의 사용으로 자멸할지도 모르는 전망 등 몇 가지 현상들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새 시대를 맞는 세계, 우주 여행의 세계, 과학과 기술 공학적으로 일찍이 없었던 성과를 달성한 세계는 동시에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세계,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세계가 아닐까? (8항)

인간이 만든 것에 인간이 위협받는 상태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통찰력과 권위를 가지고 그려 낸 묘사를 우리 기억에 생생히 보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것을 “시대의 표징”과 부단히 변화하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의 요청에 적용해 보고자 시도할 것이다.

현대의 인간은 어느 때보다 자기가 만들어 낸 것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하다.

곧 인간의 손 나아가서는 인간 지성과 의지의 성향이 만들어 낸 작업의 결과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인간의 이 다양한 결과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인간의 이 다양한 활동이 빚어내는 산물이 그것을 만들어 낸 인간의 손을 벗어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도대체 너무도 빨리 그리고 때로는 도저히 예측 못할 방식으로 “소외”를 빚어 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간접적인 결과를 통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에게 역행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거스르고 있거나 거스르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것이 광범위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현대적 드라마에서 본장(本章)을 차지하는 현상인 듯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갈수록 두려움 속에 살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들 ─ 물론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지만 그 일부, 특히 인간의 재능과 창의성을 각별히 쏟은 것들 ─ 이 인간 자신에게 철저하게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자기 파멸을 몰고 오는 수단이자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때의 파멸에 비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시시해질 정도이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태초부터 땅을 복종시키라고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어떻게 해서 인간에게 반역하게 되는가? 어떻게 해서 그 능력이 불안과 의식적 무의식적 공포와 위협이 되어 현대 인간 가족 전체에 침투하고 갖가지 측면에서 자태를 나타내게 되는가?

인간이 만든 것에 인간이 위협받는 이 상태는 여러 방면으로 또 여러 가지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위성인 지구의 개발이 합리적이고 솔직한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점차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울러 산업적인 목적뿐 아니고 군사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구의 개발, 장기적이고 진정 인본주의적인 계획의 범위를 이탈한 기술 공학의 통제 불가능한 발전이 인간의 자연 환경을 흔히 위협하고, 인간과 자연의 상호 관계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며, 인간을 자연에게서 이탈시키고 있다.

인간은 자연 환경을 놓고서 즉각적 이용과 소비에 유익한 것 말고는 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창조주의 뜻은 인간이 현명하고 기품있는 “주인”이자 “보호자”로서 자연과 통교(通交)하는 것이지 “착취자”나 “파괴자”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 공학의 발달과, 기술 공학의 향상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문명의 발달은 윤리와 도덕의 조화 있는 발달을 아울러 요청한다.

현 시점에서는 불행하게도 후자의 발달이 언제나 뒤에 처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놀라운 진보에도, 이 진보가 크게 불안을 낳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 인간 진보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이는 참다운 표지, 창세기 첫 머리에 인간의 창조를 논하는 대목에서부터 우리에게 창조적 씨앗처럼 계시된 바 있는 그 표지를 보기 힘들다는 데 이유가 있다.

불안의 첫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

인간을 장본인이며 주동자로 하고 있는 이 진보가 지상의 인간 생활을 모든 면에서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있는가? 그것이 인간 생활을 더욱 “인간에게 가치 있는” 생활로 만드는가? 여러 면에서 사실 그렇다고 하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이 질문은 다시 원상으로 되돌아와 버린다.

이 진보의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이 인간으로서 정말 더 향상되는가? 말하자면 영성적으로 더욱 성숙하며, 자기 인간성의 품위를 더욱 의식하며, 더 책임감이 생기며, 타인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빈궁하고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을 열며, 주려는 마음과 모든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더 생기는가?

이 질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제기해야 마땅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인간의 문제에 전반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이 만인을 통하여, 그 가운데에서도 현대 개발과 진보에 능동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사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통해서 제기되어야 한다.

이 진보의 과정을 관찰하거나 참여하는 데에 우리는 그저 도취감에 빠져서도 안되고 우리의 성과를 두고 일방적인 열광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오히려 절대적 솔직함과 객관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현대와 미래에 있게 될 인간의 상황에 관한 근본 의문들을 스스로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달성한 모든 성과와 미래에 기술 공학에 기대하는 계획들이 과연 인간의 윤리적 영성적 진보와 부합하는가? 이 과정에서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서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퇴보하고 그의 인간성에서 타락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들 안에, 그리고 “인간의 세계”-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안에서 과연 선이 악을 제압하고 있는가?

인간 내부에,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사회적 사랑이 증가하고 타인들-각 인간, 국가와 민족-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증가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각종 이기심, 진정한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국수주의, 자기의 합법적 권리와 공적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는 악습, 물질적인 진보 전체를 장악하려는 악습,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이러저러한 제국주의를 비호하려는 배타적인 목적에서 생산 기술을 장악하려는 성향 등이 횡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교회가 스스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들은 현재 지구에 사는 수십억 인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명백하게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개발과 진보라는 주제는 모든 사람의 입술에, 모든 신문의 기고란에, 현대 세계의 모든 언어로 나오는 간행물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이 주제는 긍정적이고 확실한 요소들만이 아니고 의혹과 괴로운 불안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후자가 전자보다 덜 심각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사실은 인간 지식의 변증법적 성격과 들어맞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그의 인간성을 위한, 지구 인류의 미래를 위한 염려가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요청과 부합된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영감을 받는 교회는, 인간을 위한, 그의 인간성을 위한, 지구 인류의 미래를 위한, 따라서 개발과 진보의 전체 과정을 위한 염려가 교회 사명의 본질적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라고 여긴다.

교회는 이 염려의 원리 원칙을 복음이 증언하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낸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를 통해서 이 염려를 끊임없이 증진시키고자 하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표징들에 입각하여 현대 세계에 놓인 인간의 상황을 해독하기에 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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