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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 교황 베네딕토 16세 2007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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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5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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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 교황 베네딕토 16세 2007년 1월 1일

평화의 중심인 인간 (부분 발췌)

인간과 평화: 선물과 과제

2. 성경에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1,27)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어떤 사람’입니다. 또 인간은 은총을 통하여 창조주와 계약을 맺고, 그 어떤 다른 피조물은 대신할 수 없는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41) 이러한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능력과 정의와 평화로 세상을 새롭게 하여 그 진보에 기여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인간에게 맡겨진 과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42)라고 탁월하게 요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이러한 선물과 과제의 양면에 대한 의식을 길러나갈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3. 또한 평화도 선물인 동시에 과제입니다. 개인과 민족 간의 평화는, 곧 더불어 살고 서로 정의와 연대의 관계를 맺는 능력은, 인간의 끊임없는 의무를 보여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역시 평화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도 더욱 분명합니다. 평화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우주의 창조와 더불어 죄의 무질서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인류의 구원에서 모두 드러나는 하느님 활동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구원은 인간의 지상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저의 존경하올 선임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5년 10월 5일 국제연합 총회에서 “우리는 비이성적이거나 무의미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 인간 생명 안에 새겨져 개인과 민족들이 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덕 논리가 있습니다.”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월적 ‘문법,’ 말하자면 개인행동의 원칙, 그리고 정의와 연대성에 따른 인간 상호 관계의 원칙은 하느님의 현명하신 계획이 반영된 인간 양심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재확인했듯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비이성이 아니라 이성이신 영원하신 말씀이 계십니다.”44) 그래서 평화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개인적 응답을 요구하는 과제입니다. 이러한 응답의 기준은 오직 거룩하신 창조주께서 인간 마음에 새겨 놓으신 “문법”을 존중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법의 규정을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외부에서 내린 명령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이를 인간 본성에 새겨진 하느님의 보편계획을 충실히 수행하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규정을 따르면 모든 민족들은 자신의 문화 안에서 가장 위대한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자연법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러 종교 신자들 사이의 대화에서나,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들 간 대화의 기초가 됩니다. 가장 중요한 중심점으로서 자연법은 참다운 평화의 근본적인 전제조건도 됩니다.

모든 인간의 타고난 평등

6. 이 세상에서 평화를 위협하는 많은 갈등의 근원에는 확실히 많은 부당한 불평등이 여전히 비극적으로 존재합니다. 특히 사악한 것은 식량, 물, 거처, 건강과 같이 기본적인 것을 얻는 불평등입니다. 또한 기본적인 인권 행사에서 남녀 간에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평화 건설의 근본 요소는 보편적인 초월적 존엄에 기원을 둔 인간의 본질적 평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의 평등은 하느님의 창조계획에서 유래하는 본성의 “문법”에 새겨진 모두에 속한 선입니다. 이를 무시하거나 조롱하면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많은 민족들에 대한 매우 심각한 박탈은 폭력적 반발의 원인이 되어 평화에 막대한 손상을 입히는 것입니다.

7. 또한 여성의 조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을 경우 사회 구조가 불안정해집니다. 저는 여성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여성 착취와 여성의 존엄을 존중하지 않는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저는 다른 맥락에서 일부 문화에 상존하는 정서에 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여성이 여전히 남성의 자의적 결정에 종속되어 여성의 인격적 존엄과 근본적 자유 행사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형태의 차별이 극복되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 정착은 꿈꿀 수 없습니다. 이러한 차별이 창조주께서 모든 인간에게 선사하신 인간존엄을 손상하기 때문입니다.45)

‘평화 생태학’

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래의 선한 목적을 따라 사용하도록 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인간도 선물하셨으니 인간은 자신이 타고난 자연적 윤리적인 구조를 존중해야 한다.”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위임하신 이러한 임무에 응답하여 인간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학과 더불어 이른바 ‘인간’ 생태학이 있습니다. 이는 다시 ‘사회’ 생태학을 필요로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진정으로 평화를 바란다면 자연 생태학 곧 자연존중과 인간 생태학의 연관성을 더욱 잘 인식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환경을 무시하면 인간의 공존을 해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경험이 말해줍니다. 피조물과의 평화와 인간 간의 평화에는 불가분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더욱 자명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평화는 모두 하느님과의 평화를 전제로 합니다. ‘태양의 찬가’로 알려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적 기도는 이러한 다면적인 평화 생태학의 놀랍고 적절한 모범입니다.

9. 이 두 생태학의 밀접한 연관성은 점점 더 심각해져가는 에너지 공급 문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 신생국들이 산업 생산에 몰입함에 따라 에너지 수요가 증가되고 있습니다. 이는 가용 자원을 둘러싼 전대미문의 경쟁을 촉발하였습니다. 그런 반면에 지구의 일부 지역은 뒤처지고 사실상 발전이 중단됩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원인의 일부입니다. 이런 민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에너지 공급이 부족하면 그들에게 무슨 발전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에너지 자원 경쟁으로 어떤 불의와 갈등이 촉발되겠습니까? 이러한 경쟁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 존엄을 존중하고 인간의 참다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개인 간의 관계와 국가 간의 관계 수립에 자연 존중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보여줍니다. 환경을 부적절하거나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환경 파괴와 지구 자원의 무자비한 축적은 불만과 갈등 그리고 전쟁을 야기합니다. 바로 그러한 파괴와 축적이 개발에 대한 비인간적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발전이 도덕-종교적 차원을 무시하고 기술-경제적 측면에 국한된 경우 이는 온전한 인간 발전이 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인간의 파괴적 능력의 고삐를 풀어 놓는 결과를 분명히 초래할 것입니다.

편협한 인간관

10. 그래서 현재 우리가 국제적인 어려움과 긴장의 구조 안에 있다고 해도 ‘평화의 나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인간 생태학을 위한 노력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증오와 폭력을 야기할 수 있는 이념과 문화적 편견, 또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에 물들지않은 인간관을 따라야 합니다. 인간관이 문화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적대감과 폭력의 씨앗을 내포한 인류학적 개념의 증식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타인에 대해 관용적이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도록 한다면 이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관한 특정한 생각이 범죄 행위의 근원이 된다면 이는 이 생각이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11. 그러나 오늘날 평화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오는 분쟁뿐만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을 이루는 것에 대한 무관심에 의해서도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특정한 인간 본성의 존재를 부인하여 인간을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관한 지나친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빈약한’ 인간관은 아무리 특이한 것이라 하더라도 단지 피상적으로 평화를 옹호할 뿐입니다. 실제로는 이러한 관점은 참다운 대화를 방해하고 권위주의적 강요를 가능하게 하여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결과 억압과 폭력에 쉽게 희생당하게 합니다.

인간 초월성의 보루인 교회

16. 마지막으로 저는 하느님 백성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화 구축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인간 존엄과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정성을 다해 수호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 “인간 초월성의 표지이며 보루”47)인 교회로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평화라는 근본적 선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청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형제자매, 특히 가난과 궁핍으로 고통을 받는 것에 더해 이 소중한 선마저 빼앗긴 이들을 도우며 평화를 위하여 기꺼이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사랑”(1 요한 4,8)이시고 모든 인간의 가장 지고한 소명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밝혀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존엄을 확고하게 옹호하고 평화를 용기 있게 구축하여야 하는 궁극적 이유 를 찾을 수 있습니다.

17.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의 가르침을 따라 참다운 온전한 인본주의의 발전에 확고히 기여해야 합니다. 올해 우리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 반포 40주년과 회칙 「사회적 관심」 반포 20주년을 기념할 것입니다. 위험과 어려움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희망이 넘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2007년을 맞이하여 저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평화의 모후께  모든 인류를 위한 저의 간절한 기도를 맡겨드립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평화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어 우리가 평화의 중심인 모든 인간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바티칸

2006년 12월 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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