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6월 26일(다해)
대전주보 3면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
김대건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부위원장)
오늘은 먼저 7. “삼위일체와 피조물들의 상호 관계”(238-240항)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부께서는 모든 것의 궁극적 원천이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되시어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자애로우신 분이십니다. 성부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성자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성자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이 땅과 결합시키셨습니다. 무한한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세계의 중심 깊이 현존하시면서 새로운 길에 영감과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그 안에 고유한 삼위일체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8. “모든 피조물의 모후”(241-242항)이신 성모님은 예수님을 돌보신 것과 같이 이제 이 상처 입은 세상을 모성애로 함께 아파하며 돌보십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곁에는 요셉 성인이 있습니다.” 그러니 9. “태양 너머”(243-245항) 영원한 삶을 향해 “노래하며 걸어갑시다! 이 지구를 위한 우리의 투쟁과 염려가 결코 우리 희망의 기쁨을 앗아 가지 못합니다.” 이를 위해 교황님은 두 가지 기도, 곧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 바치기를 제안합니다. 이것으로 회칙 『찬미받으소서』 설명을 마칩니다.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6월 26일(다해)
청년주보 제161호 4면 ‘찬미받으소서’
신성수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총무)
실천적 상대주의
통독: 회칙 122-123항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소피스트 철학자로 유명한 프라타고라스가 했던 말인데요. 예전 윤리과목 시간에 ‘소크라테스=절대주의 vs 소피스트=상대주의’ 이렇게 적으면서 외웠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입장을 ‘진리’는 없다고까지 극단적으로 몰아붙였던 건데요. 문제는 이런 주장으로 명백하고 확실한 무언가를 밀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엉뚱한 무언가가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황님께서는 바로 이런 세태를 일컬어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실천적 상대주의가 교리적 상대주의보다 훨씬 위험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복음의 기쁨 80항, 회칙 122항) 때문에 ‘만물의 척도’라는 인간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당장의 유익’이 가장 밑바탕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즉, 진리가 효용성, 자본, 힘과 같은 무언가로 바뀌게 되면서 그 기준에 미치지 않는 것들은 얼마든지 쓰고 버리는 도구가 된다는 거죠. 사람도 절대 예외는 아니고요.
“만연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인간의 무한한 힘의 숭배와 더불어,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상대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회칙 122항에서는 이러한 오늘날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등급표나 가격표 같은 보이지 않지만 확연히 보이는 딱지를 붙여놓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 야생동물, 생태환경과 같은 약자는 어떤 논리로 지킬 수 있을까요?
분명 상대방의 입장이나 처지를 배려하는 것은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배려하고 인정하는 객관적인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없다면, 전쟁이나 범죄와 같은 행위를 규제할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일상 안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며 고집부리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누가 개입할 수 있을까요? 공권력이나 제도만 탓하면 해결될 문제일까요?
가톨릭교회는 태생적으로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기준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엉뚱한 무언가가 주인 노릇을 하는지!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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