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은 예수님께서 동반의 시작에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처럼 “임마누엘”(마태오 1장 23절), 곧 “임장(臨場)”입니다(탈출기 3장 14절 참조).
동반하는 사람이 동반하고자 하는 그 존재가 있는 그 곳(場)에 함께 있는 것(臨).
아니 누군가가 동반하는 그 존재에게 다가가서(ac=ad=>to) 그 존재가 먹는 빵(pany=panis=>bread)을 함께(com=cum=>with) 먹는 것.
이것이 임장이고 동반입니다.
누군가가 한 존재를 동반할 때, 그 존재를 이끄는 것이 그 존재 곁에 있어 주는 것보다 쉽습니다.
사랑이 깊으면 어려운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커집니다.
참으로 한 존재의 곁에 함께 있어 주는 동반행으로서 강생과 고난은 사랑의 결과이고 연민(compassion)의 결실이며 공감(empathy)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강생과 고난은 길이 되어 주는 것이고, 바닥이 되어 주는 것이며, 밥을 함께 먹는 것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는 너들에게 밥이 되어 주는 것을 뜻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요한은 "친구가 똥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대개는 똥물 밖에서 똥물에 빠졌다고 욕하거나 비난하거나 나오라고 소리치거나 한다면서, 그라면 이때 어떻게 할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똥물 밖으로 나오도록 손을 잡아 주거나 막대기나 끈을 던져줘서 잡고 나오게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는데, 장일순은 친구가 빠진 똥물 안으로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최성현지음, 좁쌀한알, 도솔, 2004, 151; 같은 책, 224에 소개된 “흙탕물을 다시 맑은 물로 만들려면”도 참조).
이것이 예수님의 강생을 설명해 줍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장일순은 예수님의 탄생을 똥물 비유로 현대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루카가 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맞아들여 주는 존재들이 없는 상태에서도 친구들을 찾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마굿간까지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으로 이루시는 강생에서 봅니다.
그분은 친구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는데(요한 15장 13절), 그분의 강생과 고난은 친구들을 위한 사랑의 동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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