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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2015년 5월 24일 -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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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0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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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받으소서 LAUDATO SI’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2015년 5월 24일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이어져 있다

인간 환경과 자연 환경은 함께 악화됩니다. 우리가 인간과 사회의 훼손의 원인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환경 훼손에 적절히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사실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특히 이 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일상생활의 체험과 과학 연구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경 훼손의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5) 예를 들어, 물고기 개체수의 감소는 다른 생계 수단이 마땅치 않은 영세 어민들에게 특히 어려움을 주게 됩니다. 수질 오염은 특히 생수를 사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해수면 상승은 주로 해안 주변에 사는 달리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의 이러한 불균형의 영향은 많은 가난한 이들의 이른 사망, 자원의 결핍으로 야기되는 분쟁, 국제적 논의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많은 다른 문제들에서 나타납니다. (48항)

특히 소외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은 수십 억 명에 이르러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오늘날 국제적인 정치와 경제 토론에서 이들이 언급되며 부수적 피해자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그들의 문제는 부가적으로, 거의 마지못해서 또는 피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게 됩니다. 사

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서 보면 소외된 이들의 문제는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많은 전문가, 여론 선도자, 통신 매체, 권력의 핵심들이 부유한 도시 지역에 위치하여 가난한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거의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발전에 따른 편안한 위치와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삶의 질을 누리며 생활하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만남의 결여는 종종 도시의 해체로 촉발되며 양심이 무뎌지게 하고 현실에 있는 것을 무시하는 편향된 분석을 낳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말로는 ‘환경’을 옹호하면서도 이러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관한 논의에 결부시켜 지구의 외침과 가난한 이들의 외침 모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49항)

우리가 “음식을 버릴 때마다, 그 음식은 마치 가난한 이들의 식탁에서 훔쳐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50항)

생태적 회심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에도 “산업 문명의 역효과에 따른 생태적 재난”의 가능성에 대하여 비슷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가장 뛰어난 과학적 발전, 가장 놀라운 기술 능력, 가장 엄청난 경제 성장은 참다운 사회적 도덕적 발전과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을 대적하게 될” 것이므로 “인간 행위의 근본적인 변화가 긴급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4항)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이 문제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당신의 첫 회칙에서 인간이 자주 “자연 환경을 놓고서 즉각적 이용과 소비에 유익한 것 말고는 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듯”16)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나중에 성인께서는 세계적인 생태적 회개를 요청하 셨습니다.17) 또한 성인께서는 “참다운 인간 생태론의 도덕적 환경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세상을 맡기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 생명 자체가 많은 타락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선물이기에 인간 환경의 파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 세상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는 “생활 양식, 생산과 소비 양식 그리고 오늘날 사회를 다스리는, 이미 확립된 권력 구조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참다운 인간 발전에는 도덕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온전한 존중을 전제로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 사물의 본성과 그것이 질서 있는 체제, 정확하게 말해서 ‘우주’에서 차지하는 상호 연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현실 변화 능력은 하느님께서 최초로 우리에게 선사하신 사물을 바탕으로 발휘되어야 합니다. (5항)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께서는 특히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지구를 해친 것을 회개할 필요를 언급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환경 피해를 일으키면” 우리가 “크든 작든 피조물의 변형과 파괴를 야기한다는”18) 사실을 인식하도록 요청 받기 때문입니다. 총대주교께서는 강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이를 되풀이 하여 말씀하시며 우리가 피조물에 저지른 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피조물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기후 변화를 일으켜 지구의 본디 모습에 손상을 입히고, 자연 삼림과 습지를 파괴하며, 지구의 물, 흙, 공기, 생명을 오염시키는 것은 모두 죄가 됩니다.”19) “자연 세계에 저지른 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20)이기 때문입니다. (8항)

환경 위기는 깊은 내적 회개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신심이 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내세워 환경에 대한 관심을 우습게 여기고 있음도 인정하여야 합니다. 또 일부는 수동적이어서 자신의 습관을 바꾸려는 결심을 하지 않고 일관성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생태적 회개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작품을 지키는 이들로서 우리의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의 삶에 핵심이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 체험에서 선택적이거나 부차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217항)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며 피조물과의 건전한 관계가 인간의 온전한 회개의 한 차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또한 자신의 잘못이나 죄, 악습, 태만의 인정, 그리고 참된 회개와 내적 변화를 요청합니다. 호주 주교님들은 피조물들과의 화해라는 의미에서 회개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러한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며 우리의 행위와 방관으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해를 끼쳐왔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 곧 마음을 바꾸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218항)

공동의 집에 살면서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서 이루는 우주적 가족과 우주적 형제애와 우주적 친교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이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저의 주님,찬미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 저희를 돌보며 지켜주는 대지는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나이다.” (1항)

이 누이가 지금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구에 선사하신 재화들이 우리의 무책임한 이용과 남용으로 손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마음대로 약탈할 권리를 받은 주인과 소유주를 자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로 상처 입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폭력은 흙과 물과 공기와 모든 생명체의 병리 증상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억압받고 황폐화된 땅도 가장 버림받고 혹사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구는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로마 8,22)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흙의 먼지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창세 2,7 참조). 우리의 몸은 지구의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공기를 마시며 지구의 물로 생명과 생기를 얻습니다. (2항)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해와달 또는 가장 작은 동물들을 바라 볼 때마다 모든 피조물을 찬미하며 노래를부르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꽃 앞에서 설교하시며 “꽃이 마치 이성을 지닌 듯 주님을 찬미하도록”21) 초대하셨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그분의 반응은 지적 평가나 경제적 계산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유대로 당신과 결합된 누이였습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명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의 제자인 보나벤투라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모든 사물의 공통의 원천에 관한 성찰로 더욱 커다란 측은지심에 찬 성인께서는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셨습니다.”(11항)

이 세상의 피조물들에 주인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지혜 11,26 참조) 그래서 우리는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우주적 가족(번역문에는 “보편 가정”), 곧 숭고한 공동체를 이루어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며 겸손한 존중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긴밀하게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마치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의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89항)

또한 우주적(번역문에는 “보편적”으로 번역되어 있음) 친교에 마음을 열면,이러한 형제애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잔혹함은 언제나 어느 모로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이어서 동물을 학대하도록 이끄는 비열함은 곧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어떤 피조물에 대한 것이든 모든 학대는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22)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그 어떤 측면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우리가 큰 사랑을 한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평화와 정의, 그리고 피조물 보호는 서로 철저하게 연결된 주제입니다. 이를 분리하여 개별 주제로 다루면 결국 환원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23)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엮여서 형제자매로 일치되어 멋진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으로 우리를 형제인 태양, 자매인 달, 형제인 강, 어머니인 대지와 온유한 애정으로 하나가 되도록 해줍니다. (92항)

개인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매우 복잡한 상황의 해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도구적 이성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상실하여 결국 윤리, 그리고 사회와 환경에 대한 의식 없이 소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회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이 임무는 “인간에게 엄청난 과제이기에 개인적 노력이나 개인주의적으로 자란 인간들이 연합하여 노력을 기울여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다스리는 일은 전혀 다른 태도에서 나오는 결합된 기술과 일치된 성과를 필요로 합니다.”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생태적 회개는 공동체의 회개이기도 합니다. (219항)

이러한 회개에는 여러 가지 태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태도들이 서로 어우러져 관대하고 부드러움이 넘치는 환경 보호의 정신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먼저 감사와 무상성의 태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으로 선물하셨기에 우리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포기하고 누가 보거나 인정하지 않더라도 관대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것이다”(마태 6,3-4). 또한 이러한 회개는 우리가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커다란 우주적(번역문에는 “보편적”으로 번역되어 있음) 친교를 이루고 있다는 사랑에 넘치는 인식을 포함합니다. 신자들은 세상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바라보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모든 존재와 결합시켜 주신 유대를 깨닫습니다. 생태적 회개는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을 증진시켜주어, 창의력을 전개하고 열정을 북돋우도록 하며,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로 봉헌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을 개인적 영광이나 무책임한 지배의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서 비롯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220항)

이 회칙의 서두에서 제시한 우리 신앙에 대한 여러 확신들이 그러한 회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줍니다. 여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모로 반영하며 우리를 가르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이 물질 세계에 몸소 오시고 이제 부활하시어 모든 존재의 내면에 현존하시며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당신 빛으로 밝혀 주신다는 확신이 포함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그 안에 인간이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질서와 역동성을 새겨 주셨다는 인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새들에 대하여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셨다.”(루카12,6) 라고 하신 말씀을 읽고서도, 새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해칠 수 있습니까?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개의 이 차원을 분명히 드러내어, 우리가 받은 은총의 힘과 빛이 다른 피조물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도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그토록 훌륭하게 실천하신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숭고한 형제애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221항)

자연을 돌보는 일은 더불어 사는 삶과 친교의 능력을 포함하는 생활 양식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며 그래서 우리가 형제자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형제애는 대가가 없는 것이어야만 하기에, 결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나 앞으로 해줄 것을 기대하고 주는 선금과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바람과 태양과 구름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주적(번역문에는 “보편적”으로 옮겨져 있음) 형제애를 논할 수 있습니다. (228항)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천이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되시어 당신 자신을 알려주는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보여주시며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아드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이 땅과 결합시키셨습니다. 무한한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세상의 중심 깊이 현존하시면서 새로운 길에 영감과 힘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세상은 삼위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삼위께서는 하나의 신적 근원에서 나오셨지만 각각의 위격에 따라 함께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관상할 때, 우리는 온전하신 삼위일체께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38항)

피조물들은 하느님을 향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모든 생명체는 다른 것을 향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기에, 우리는 온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뒤얽혀 있는 많은 지속적인 관계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24) 이는 우리가 이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유대에 대하여 경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현을위한 열쇠를 발견하도록 이끕니다. 실제로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타인, 모든 피조물과 친교를 이루어 살면서 관계를 맺을수록 더욱 크게 자라고 성숙해지며 거룩해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 그 내면에 새겨 주신 삼위일체의 역동성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이는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흘러나오는 세계적인 연대의 영성을 기르도록 이끕니다. (240항)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부활하신 주님의 빛나는 현존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시며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거룩한 정신에 합당한 무한한 창조력 소유하시어 가장 복잡하고 풀 수 없는 인간 문제의 매듭을 푸는 방법을 알고 계시기”25)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제하시며 어느 모로 개선의 여지가 있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악이나 위험 또는 고통의 원천으로 여기는 많은 것들은 사실 우리가 창조주와 협력하도록 이끄는 출산의 고통이 됩니다.26)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시면서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현존하시어 현세 사물의 합당한 자율성을 가져옵니다.27)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은 모든 존재의 생존과 성장을 보장해 주며, “창조 사업을 계속 이어나갑니다.”28) 하느님의 성령은 이 세상을 가능성으로 가득 채우시었기에 사물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언제나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사물 안에 새겨진 어떤 예술, 곧 하느님 예술의 이성에 다름없습니다. 이 이성을 통하여 사물은 특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는 마치 배를 만드는 사람이 나무에 스스로 배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80항)

브라질 주교님들은 자연 전체가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현존의 자리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살아계시며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십니다.29) 이러한 현존의 발견은 우리가 “생태적 덕목들”30)을 키워나가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세상 사물들은 하느님과 무한히 떨어져 있어 하느님의 충만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피조물들을 잘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 적합한 고유한 자리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피조물들이 워낙 작아서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을 무리하게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88항)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지상에 계셨던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이 세상과 맺으신 실재적인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시어 당신의 보편적 주권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9-20). 이는 우리를 마지막 때로 이끕니다.

곧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전하시어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1코린 15,28 참조). 이리하여 이 세상의 피조물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그들의 목적인 충만으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감탄하셨던 들판의 바로 그 꽃들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100항)

통합 생태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오늘날의 문제들이 세계적 위기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는 시각을 요구하기 때문에, 저는 인간적 사회적 차원을 분명히 존중하는 통합 생태론의 다양한 요소들에 관한 성찰을 제안합니다.(137항)

생태론은 살아있는 유기체들과 그 유기체가 성장하는 환경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사회의 삶과 존속의 조건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따르게 됩니다. 또한 발전, 생산, 소비의 모형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솔직함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원자나 소립자조차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구의 물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구성 요소들이 서로 관련되듯이, 생물종들도 우리가 결코 그 전체를 알고 이해할 수 없을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유전 정보를 여러 생명체들과 공유합니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에 대한 폭넓은 전망에 연결되지 않으면 일종의 무지가 될 수 있습니다. (138항)

우리가 ‘환경’이라고 말할 때 이는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가 이루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우리 자신과 분리된 것이나 단순한 우리 삶의 틀로만 여기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합니다. 어떤 지역이 오염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사회의 기능, 경제, 행태, 유형, 현실 이해 방식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변화의 규모를 생각해 볼 때, 개별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별도의 답을 찾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연계 자체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며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 위기와 사회 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 그 해결책을 위한 전략에는 빈곤 퇴치와 소외된 이들의 존엄 회복과 동시에 자연보호를 위한 통합적인 접근이 요구됩니다. (139항)

자연의 유산과 마찬가지로 역사, 예술, 문화의 유산도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유산은 한 지역의 공동 정체성을 이루고 살만한 도시 건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도시를 무너뜨리고, 사람이 사는 데에 반드시 편하지만은 않은 이른바 더 친환경적인 도시를 새로 건설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역사와 문화와 건축을 통합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생태론은 가장 넓은 의미의 인류 문화재 보호와도 관련됩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환경과 관련된 문제를 분석하면서 과학기술 언어와 일상 언어의 대화를 촉진하고 지역 문화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를 과거의 기념물로만 여길 수 없습니다. 문화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성찰할 때 배제할 수 없는 살아있고 역동적이며 능동적인 것입니다. (143항)

인간 생태론에는 또 다른 심오한 측면도 있습니다. 곧 인간의 삶과 우리 본성에 새겨진 도덕률이 맺는 필연적인 관계, 곧 더 존엄한 환경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사람 역시 존중해야 하며,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토대를 둔 ‘인간 생태론’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31)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몸이 우리가 환경과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해준다는 것을 인식해야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이세상을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이며 우리의 공동의 집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피조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몸을 받아들이며 돌보고 그 의미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참다운 인간 생태론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몸의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성을 만나면서 자신을 인식하는 데에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의 작품인 나와 다른 남자나 여자라는 특별한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성적 차이에 대처하는 법을 모르니 그 차이를 없애야 한다."라고 주장하는것은 건전한 태도가 아닙니다.(155항)

공동선의 개념은 또한 미래 세대도 관련됩니다. 세계 경제 위기는 우리 후손들도 예외일 수 없는 공동 운명을 무시하는 심각한 악영향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대 간 연대 없이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더 이상 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지구를 생각하면, 우리가 거저 받은 선물을 전달하는 것에 관한 새로운 논리에 접어들게 됩니다.땅이 우리에게 선사된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개인적 유익을 위한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대 간 연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받은 지구는 우리 후손들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주교님들은 우리가 이러한 정의의 의무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환경은 받음의 논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각 세대가 빌려 쓰는 것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합 생태론은 이러한 폭넓은 정망을 담은 것입니다.(159항)

포함한 새로운 통합적 접근을 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흔히 정치는 올바른 공공 정책의 부재와 부패로 스스로 그 불신에 책임을 지게 됩니다. 한 지역 국가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일부 기업 집단이 후원자를 자처하며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어떤 규정들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조직범죄, 인신매매, 마약매매, 폭력과 같은 근절시키기 어려운 모든 형태의 범죄들을 야기하는 데에 이릅니다. 정치가 왜곡된 논리를 깨어버릴 수 없고,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인류의 주요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다운 변화를 위한 전략에는 전체 과정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현대 문화의 뿌리에 놓여있는 논리를 문제 삼지 않고 생태를 피상적으로만 다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건전한 정치는 이러한 문제에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197항)

일상 생활의 생태에서 시민적 사랑 정치적 사랑 사회적 사랑

미국의 주교들은 “힘 있는 이익 집단이 주도하는 토론에서 가난한 이들과 무력한 이들과 취약한 이들의 요구”33)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인류 가족이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숨을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국경도 장벽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무관심의 세계화를 위한 공간은 더욱 존재하지 않습니다. (52항)인간의 능력을 무책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당면하여 개별 국가는 자기 영토 안에서 수행하는 계획, 조정, 감시, 제재의 기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기술적 혁신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사회가 어떻게 그 미래를 설계하고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감시와 조정의 기능을 담당하는 요소에는 법률이 있으며, 이는 공동선에 비추어 허용되는 행위 규정을 마련합니다.

건전하고 성숙하며 자주적인 사회가 마련해야 하는 제한에는 예측, 주의, 적절한 규정, 규정 적용 감시, 부패 척결, 생산 과정의 바람직하지 않은 부작용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 불확실하거나 가능한 위험에 대한 적절한 개입이 있습니다. 기업 활동으로 발생되는 오염의 감소를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제도적 틀은 단지 나쁜 관행의 방지만이 아니라 바람직한 관행을 장려하고, 개인적 집단적 계획을 촉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창의력을 증진해야 합니다. (177항)

즉각적인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적 계획은 소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단기적인 성장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선거권자들의 이해에 부응하여 소비 수준에 영향을 미치거나 해외 투자를 위협하는 조치로 국민들을 쉽사리 자극하려들지 않습니다. 근시안적인 정권 수립으로 환경에 관한 장기적인 안건들이 정부의 공공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34)는 것을, 곧 권력의 자리를 지배하는 것보다 그 과정을 이끌어내는 데에 더 주의를 기울일 때에 언제나 더 풍요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정치적인 위대함은 어려운 시기에 중요한 기본 원칙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며 장기적인 공동선을 배려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국가적인 계획에서 정권이 이러한 의무를 다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178항)

일부 지역에서는 협동조합들이 생겨나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지역적으로 자급자족을 하고 남는 에너지는 팔기까지 합니다. 이 단순한 사례는 기존의 세계 질서가 책임을 지지 못하는 반면에, 지역의 개인과 단체들이 큰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역의 개인과 단체의 차원에서는 더 큰 책임감, 더 강한 공동체 의식, 특별한 보호 능력, 더 많은 창의력, 자기 땅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남겨줄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지역 주민들에게 매우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때로는 부패로 법 집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정치적 결정에는 국민들이 압력이 필요합니다. 비정부 기구와 중간 집단들을 통해 사회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더욱 엄격한 정책과 절차와 통제 방식을 만들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시민들이 국가와 지역과 지자체의 정치적 권력을 통제하지 않으면 환경 피해를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웃한 공동체들이 합의하여 동일한 환경 정책을 지지하면 지자체의 법률이 더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179항)

기업 활동과 사업의 환경 영향 평가는 투명한 정치적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여기에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특혜를 통하여 특정 계획의 실제적인 환경 영향을 은폐하는 부패는 흔히 정보 제공의 의무와 충분한 논의가 결여된 모호한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182항)

환경 영향 평가는 생산 계획 또는 어떤 정책이나 계획 또는 프로그램의 수립 이후에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환경 영향 평가는 처음부터 이루어져야 하며 학제적인 방식으로 투명하며 모든 경제적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 시행되어야 합니다. 이 평가는 반드시 노동 조건과 인간의 육체와 정신 건강, 그리고 지역의 경제와 안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결과로 사람들은 발생 가능한 일들을 고려하고 억제가 가능한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한 추가 투자를 현실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다양한 관점과 해결책과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는 사회 관계자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늘 필요합니다. 토론에서 지역 주민들의 의견이 특별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자녀들의 미래에 필요한 것에 대하여 고민하고,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초월한 목적들을 생각해낼 수 있습니다. 모든 관계자의 숙고와 토론을 통한 정책의 수립을 위해서는 환경에 ‘개입’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참여로 모든 사람이 다양한 측면과 여러 위험과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계획에 관하여 처음에 내린 결정에만 머물지 말고 통제나 지속적인 감시 활동도 여기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과학적 정치적 토론에는 정직과 진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토론이 특정 계획의 법적 허용 여부에 관한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183항)

현재 또는 미래의 공동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 위험의 요소가 나타나는 경우 모든 결정은 “여러 가지 가능한 대안들에서 예견되는 위험과 이득을 비교하여 결정을 내리는”35)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어떠한 계획이 천연자원의 소비 증가, 배출 가스 또는 폐기물의 증가, 쓰레기 증가, 경관이나 보호받아야 하는 생물종의 서식지 또는 공공장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경우에 특히 요구됩니다. 일부 계획들에 대한 충분히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를 들어 예측하지 못한 소음 공해, 조망권 침해, 문화적 가치의 상실, 또는 핵에너지 사용의 영향과 같이 매우 다양한 문제들로 한 지역의 삶의 질이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비주의 문화는 단기적이고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여 졸속 행정 처리나 정보 은폐의 관행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184항)

어떤 사업에 관한 모든 토론에서 그 사업이 참다운 온전한 발전에 기여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합니다. [사업의]목적은? 이유는? 장소는? 시기는? 방식은? 수혜자는? 위험 요소는? 비용은? 비용 지불 주체와 방법은? 이러한 검토 과정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이 필수적이지만 부족한 자원이며, 다른 인권들의 행사의 조건이 되는 기본권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모든 환경 영향 평가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185항)

생활 양식을 바꾸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에게건전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비자 운동은 특정 상품의 불매를 통하여 기업의 행태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쳐 기업이 환경 영향과 생산 방식을 재검토하도록 합니다. 사회 관습이 기업의 수익을 위협하게 되면, 기업은 생산 방식을 바꾸라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이는 소비자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구매는 단순히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인 행위입니다.”36) 그러므로 오늘날 “환경 훼손의 문제는 우리의 생활 양식을 반성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206항)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우리가 작은 사랑의 길을 실천하고, 평화와 우정의 씨앗을 뿌리는 친절한 말, 미소, 모든 작은 몸짓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권유합니다. 또한 온전한 생태계는 폭력, 착취,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단순한 일상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이와는 반대로, 광란의 소비 세계는 또한 모든 형태의 생명을 착취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230항)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넘치는 사랑은 또한 시민적(번역본에는 “사회적”으로 옮겨져 있음) 정치적 사랑이 되며,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 대한 투신은 개인들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37)에도 영향을 주는 애덕의 탁월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 “사랑의 문명”38)이라는 이상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회적 사랑은 참다운 진보를 위한 열쇠입니다. “더욱 인간답고 더욱 인간에게 걸맞은 사회를 만들려면 사회생활-정치, 경제, 문화-에서 사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야 하며, 사랑이 지속적으로 모든 활동의 최고 규범이 되어야 합니다.”39) 이러한 맥락에서, 일상의 작은 몸짓들의 중요성과 더불어 사회적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환경 훼손을 효과적으로 막고 돌봄의 문화가 온 사회에 스며들도록 장려합니다. 이 사회적 역동성 안에 다른 이들과 함께 참여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영성에 속하는 것이고 사랑의 실천이며, 이를 통하여 자신이 성숙하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31항)

모든 이가 직접 정치를 하라는 소명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과 도시의 환경을 보호하면서 공동선을 위하여 활동하는 수많은 다양한 단체들이 사회 안에서 꽃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는 건물, 분수, 방치된 기념물, 경관, 광장과 같은 공공장소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모든 사람에게 속한것의 보호, 청결, 개선, 미화를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들 주변에서는 유대가 수립되거나 회복되며 새로운 지역 사회 관계망이 형성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동체는 소비주의적 무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동 정체성, 곧 보존과 전달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연대의식을 가지고 세상과 가장 가난한 이들의 삶의 질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집에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활동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표현할 때에 강렬한 영적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232항)

법률과 규범이 존재하여도 효과적인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그릇된 행위를 규제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법규범이 의미 있는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적절한 동기 부여로 이를 받아들여 개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확고한 덕을 기르는 것에서 시작할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생태적 사명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더 많이 소비하고 지출할 수 있어도 난방을 하는 대신에 습관적으로 옷을 더껴입는 사람은 환경 보호를 위한 신념과 태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작은 일상적 행동으로 피조물 보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고결한 일입니다.

교육이 생활 양식의 참다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환경에 대한 책임의 교육은 환경 보호에 직접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주는 다양한행동을 고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종이의 사용을 삼가고,물 사용을 줄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적당히 먹을 만큼만 요리하고, 생명체를 사랑으로 돌보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승용차 함께 타기를 실천하고,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전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최상의 면모를 보여 주는 관대하고 품위 있는 창의력에 속하는 것입니다. 뜻깊은 동기에서, 물건을 쉽게 내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211항)

이러한 노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회에 선을 퍼뜨려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때로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늘 확산되는 경향이 있는 선을 이 세상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행동의 실천은 우리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우리가 삶의 깊이를 더하고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21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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